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사야 벌린 (문단 편집) === 초년기와 학자의 길 === 이사야 벌린은 독일어를 쓰던 러시아계 유대인 출신으로 당시 [[러시아 제국]] 영토였던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 부유한 목재상 아버지 멘델 벌린과 어머니 무사 마리의 외아들로 태어났다. 1916년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리가에 진군하자 일곱살이었던 벌린은 부모를 따라 당시 러시아 제국 수도였던 [[상트페테르부르크|페트로그라드]]로 이주, 그곳에서 [[러시아 혁명|볼셰비키 혁명]]을 경험한다. 공산주의 치하에서 부르주아라고 끊임없는 감시를 당하자 그의 가족은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벌린이 12살 때 [[영국]]으로 망명했다. 영국에서는 [[런던]]에 살면서 영어를 배웠고 19세에 옥스퍼드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에 입학해 고전학과 근대사를 전공했다. 똑똑했던 벌린은 졸업 후 바로 옥스퍼드 뉴칼리지 철학과 교수가 된다. 불과 23살의 나이였다. 하지만 뉴칼리지 생활은 한없이 우울했기 때문에 몇 주만에 그만뒀고, 영국 학계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옥스퍼드 대학교 올소울즈 칼리지의 특별 연구원 선발시험에 응시하여 유대인으로는 최초로 합격했다. 이를 통해 벌린은 상류사회로 진입하여, 유명한 은행장, 외무장관, 《더 타임즈》 편집장 등과 식사를 하며 얘기를 나누기도 했고, [[로스차일드]]가(家) 사람들과 주말을 함께 보내곤 경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. 그는 [[버지니아 울프]], [[윌리엄 버틀러 예이츠]], [[미겔 데 우나무노]], 거트루드 스타인 등 수많은 유명인사들을 만날 수 있었고, 앨프리드 에이어, J.L. 오스틴, 스튜어트 햄프셔 등의 철학자들과도 수많은 토론을 펼쳤다. 이러는 중에, 벌린은 뉴 칼리지의 학장 H.A.L 피셔로부터 '가정대학 총서'에 들어갈 [[카를 마르크스]] 평전을 써보라는 제의를 받고는 1933년부터 5년 동안 집필에 매진했다. 유창한 러시아어 덕분에 영국의 대다수 학자들이 접근할 수 없었던 마르크스 사상[* [[카를 마르크스]]와 [[프리드리히 엥겔스]]의 전집인 《메가 MEGA》가 먼저 독일어로 출간되었지만 히틀러 집권후에 출간되지 못했고, 이후 소련에서 러시아어로 재출간되었기 때문이다.]에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.[* 다만 지금은 그의 마르크스 평전이 좋은 평가는 받지 못한다. 자료 수집에 한계가 있어서 학술적으로 정밀하지 못한 면이 많고, 그 때까지의 마르크스에 대한 오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.] 이 작업이 끝난 1938년 가을, 나치로부터 탈출하여 영국에 도착한 [[지그문트 프로이트]]를 만나기도 했고 1940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[[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]]을 초청해서 동료 철학자들과 함께 토론을 나누기도 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